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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내 유일한 전통사찰인 장경사 전경. 대웅전에는 경기도문화재인 장경사 동종이 300년 역사를 지키고 있다. |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비로소 군사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왜적들 앞에서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오히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 활약이 더욱 컸다. 임진란때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스님들 이었다. 스님들은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어야 불교도 있다”며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 목탁 대신 활인검, 칼을 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는 1624년 남한산성을 쌓고, 승병을 조직해 성을 지키도록 했다. 전국 8도의 스님들이 중앙본부격인 8개의 사찰을 세우고 지역별로 대중생활을 했다. 장경사는 그중 충청도 스님들이 머물던 사찰. 하지만 일제는 대부분의 절을 폐사시켰다. 장경사만이 폐사의 위기를 넘기고 유일하게 남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호란 대비해 팔도도총섭 각성스님 주도로 성 축조 후 군영으로 건립
충청도 스님들 거주 사찰 일제 강제폐사 위기 넘기며 호국불교 상징 사찰로 위치
장경사를 창건한 각성대사의 이야기다. “여보, 여보.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려나 봐요.” “그러면 오죽 좋으련만….” “간밤에 꿈에 한 스님이 제게 거울을 주시면서 잘 닦아 지니라고 하지 않겠어요. 아마도 태몽 같아요.” 결혼한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던 보은 김진사댁 부인 박씨는 10개월 후 건강한 사내 아이를 낳았다. 총명했던 아기는 다섯 살 되던 해 천자문을 마쳤다.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가 7살 되던 해,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쓰러졌다. 의원도 병명을 몰랐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한 스님이 찾아왔다. “소승이 돌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절에 가면 곧장 건강을 되찾을 것입니다.” 스님의 등에 업힌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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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한편의 작은 돌탑이 등산객과 불자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 하다. |
훗날 팔도도총섭으로 승병을 이끈 벽암각성스님이다. 각성스님은 한날 부처님으로부터 세상에 나아가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현몽을 한 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리고 전국 스님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다시 쌓았다. 남한산성이 채 완성되기 전, 청나라 군사가 몰려왔으니 각성스님의 선견지명이 임금과 나라를 구한 것이다.
당시 성을 쌓고, 사찰을 창건해 스님들이 성을 지켰다. 충청도 스님들은 망월봉을 중심으로 산성을 지키면서 장경사에서 숙식과 훈련, 수행을 병행했다. 일제시대 군대 해산령에 의해 다른 사찰은 대부분 폐사됐지만, 장경사만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5년 화재로 인해 건물이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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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사 현판이 걸린 승방. |
불과 20여 년 전만해도, 남한산성에서 장경사로 가는 제대로 된 길조차 없었다. 불사도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불사가 이뤄졌다. 현재는 대웅전을 비롯해 칠성각, 대방, 요사채가 위치하고 있는데 특히 대웅전은 화려한 고건축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앞으로는 월정사 석탑을 본뜬 다각다층석탑이 모셔져 있다.
고찰이지만, 장경사가 단순히 관광지 사찰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 오전이면 일요법회를 열고 있으며, 각종 기도법회를 통해 지역 불자들을 포교하는 도량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경우스님이 부임하면서 기도와 포교활동은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어려움도 많다. 대부분의 토지가 국가소유로 묶여 있다보니, 늘어나는 신도들을 위한 법회공간도 제대로 없는 것. 이에 대웅전 옆에 지장전을 건립하는데 이어 대웅전 아래 뜨락에 2층 누각을 세워 불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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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박스 대신 새로 조성한 종무소 건물. |
“스님들이 성을 쌓고, 사찰을 지어 국가를 지켜냈습니다. 즉, 남한산성 전체가 불교의 유적지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더불어 역사를 바로 알리고,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경우스님은 9개의 사찰이 모두 복원될 때,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이 원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경사 대웅전에는 경기도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장경사동종이 위치해 있다. 일제시대 봉은사로 강제 이전됐던 범종을 최근 봉은사의 도움으로 되찾아 왔다. 제자리를 찾은 동종은 매일 아침 저녁 예불시간이면 은은한 울림으로 내며 중생을 깨운다. 300여 년 전,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라를 지켜낸 스님들의 예불소리가 동종소리에 담겨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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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사 주지 경우스님
남한산성 전체가 사찰도량
호국불교 상징하는 유적지
경우스님이 장경사에 온지 4년이 되어 간다. “정말 후딱 지나가 버린 것 같다”는 스님의 말처럼 장경사 주지 부임 이후 ‘사건’이 많았다. 주지 발령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관리공단에서 통지가 왔다. 대웅전과 마당 일부의 소유자가 국가이니 5년치 토지 사용료 1억5천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스님들이 성을 쌓고, 사찰을 창건해 나라를 지켜낸 호국도량이 바로 장경사예요. 그런데 전통사찰 부지에 대해 이용료를 내야 한다는 말에 자괴감마저 들었어요. 각종 자료를 뒤지고, 측량조사를 했습니다.”
‘자산관리공단의 어이없는’ 통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지만, 그 과정에서 주지스님은 매일 밤잠을 설쳐야 했다. 2년간 지난한 소송을 통해 사찰토지를 찾은 경우스님은 ‘의승군 문화제’를 열었다. 남한산성을 쌓고 지킨 스님들과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조선 인조가 매년 개최했던 수륙대재의 전통도 이었다. 산성걷기 행사와 추모음악제를 통해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남한산성과 장경사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자 했다.
인조 이후 지속된 수륙대재 일제에 의해 강제 중단돼…
의승군 문화제 통해 스님들이 성을 쌓고
나라를 지켜낸 역사 전달 문화유적 복원 ‘발원’
“인조 이후 지속돼 온 수륙재가 일제시대 중단 됐어요. 이를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더불어서 남한산성 자체를 불교성지화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우선 9개의 사찰을 모두 복원하고, 곳곳에 남은 유적지를 발굴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스님들이 남한산성을 쌓고, 다음에 북한산성을 쌓아 조선의 수도를 방어해 낸 것 아닙니까. 성직자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무형의 자산입니다.”
스님은 지난해 봉은사에서 ‘장경사동종’의 존재를 확인했다. 일제시대 사찰을 폐사 시키기 위해 종을 봉은사로 옮긴 것인데, 과거 자료를 확인하던 중 알아냈다. 그리고 지난해 동종을 다시 원자리로 모셔올 수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가 놓였던 종무소는 단아한 전통건축물이 들어섰다.
“법당이 20평에 불과하다 보니, 50여 명도 못 들어가요. 법회를 보기에 너무 비좁고, 49재라도 올리게 되면 관람객들이 법당에 들어오지 못해요. 지장전 불사는 남한산성을 지켜낸 선조들을 천도하고, 역사를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웅전 아래쪽에는 2층 누각 형태로 진남루 지어 법회와 신행공간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경우스님은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후 지방의 등산객과 외국인의 발길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아직까지 남한산성 관리 주체가 여러 기관으로 나눠져 있어 빠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했다.
“남한산성에 유일한 전통사찰이 장경사입니다. 세계인이 찾는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불자들도 남한산성의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해요. 그리고 문화재청, 지방자치단체에서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복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경우스님은 많은 불자들이 장경사와 남한산성을 찾아 역사의 흔적을 만끽하기를 바란다며 인사말을 전했다.